아르네 네스와 데이비드 로텐버그의 대담,

<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

동네 사람들이 한번은 멈춰 쳐다봤을 목련나무(재작년)

재작년 봄, 옆집의 목련꽃을 보다가 갑자기 시상(詩想)이란 놈이 떠올랐다. 그때 블로그에 끄적인 시다.

펑 펑

먹먹한 포성과 함께

목련이 핀다.

하얀 굉음

찬란한 순수

잎 진 자리에

열반의 포연.

목련나무는 정말로 위풍당당했고, 무슨 이유에선지 꽃 피는 순간을 대포 소리로 비유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쓴 다음에 보니 오글거려서, ‘비공개’로 해놓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얼마 전, 아침에 나와 보니 그 목련나무가 뿌리째 뽑혀 있었다. 전날까지 멀쩡했던 나무가! 옆집 주인이 집을 헐고 빌라를 올린다더니, 개시하자마자 포클레인으로 목련나무를 한 방에 밀어버린 것이었다. 난 멍하니, 뿌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그렇게 느꼈다) 나무를 한참 보고만 있었다. 저 시는 말하자면 비명에 간 목련나무의 추모시가 되었다.

몇 년 전 내가 경기도 안산에 이사 올 때, 작은 마당이 딸린 단독 주택들이 많았고 그것이 이 동네의 매력이었다. 주택은 낡았고 마당은 시골 텃밭 같았는데, 봄에 집집마다 거기 상추, 고추, 파 또는 맨드라미나 유채꽃을 심었다. 담이 낮아 아이들도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우리 가족은 그 집들을 “저, 감나무집 있잖아”라든가 “목련나무집”, “진돗개 기르는 집”,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 따위로 불렀다.

그러나 최근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구역 전체가 카드 뒤집히듯 뒤집히는 중이다. 단 몇 달 사이에 감나무집도 목련나무집도 진돗개도 할머니도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엔 모양이 똑같은, 심지어 이름마저 하나같이 무슨무슨 ‘빌’인 빌라들이 들어섰다. 짓기는 얼마나 빨리 짓는지 전에 거기 무엇이 있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이웃집 마당을 빌려 감자와 상추를 심었는데, 봄엔 아빠들이 모여 밭갈이를 하고 끝나면 막걸리 한 잔 걸치곤 했다. 그런데 그 집도 이제 헐린다 하니 아이들 텃밭도 사라지게 생겼다. 어느 신축 빌라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공원이 보이는 전망!’이라고 써 놓았는데, 공원이 어디냐면 코딱지만 한 놀이터였다. 꽃과 나무와 살아있는 정원을 다 갈아엎고 기껏 자랑하는 풍경이 놀이터라니.

똑같은 빌라들이 선 자리에 전에 나무와 텃밭이 있었음을 상상하긴 어렵다. 

모든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노르웨이의 생태철학자 아르네 네스라면 이런 걸 ‘혼잡성의 극치’라고 하지 않았을까. 네스는 ‘혼잡성complication’과 ‘복잡성complexity’을 구분했다. 현대인들은 오늘날 사회가 과거보다 “엄청나게 복잡하다”고 말하길 좋아한다. 과연 그럴까? 내가 묘사한 동네 풍경을 떠올려보라. 천편일률의 빌라들, 그것들이 만드는 숨 막히는 단조로움, 그게 현대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어떠한 조화도 안정도 주지 않는 것, 그런 건 혼잡성에 불과하다.

반면 네스가 말하는 복잡성이란, 온갖 들꽃과 동물들이 제 개성을 맘껏 발휘하면서 전체 세계의 일부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산의 풍경 같은 것이다. 그 복잡성은 풍요로움과 같은 말이다. 네스는 인간도 삶의 수단을 단순화하고 꼭 필요한 관심사에만 집중할 때 풍요로운 복잡성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1912년에 태어난 아르네 네스는 27살에 오슬로 대학의 최연소 철학 정교수가 되었지만 해발 2천미터의 트베르가스타인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등산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사상을 넓혀 나갔다. 그는 트베르가스타인의 생활이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믿었다. 삶의 수단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반면 욕구를 위해 더 많은 수단이 필요할 때 삶은 혼잡해진다. 일 년에 한 번 비싼 휴가를 떠나기 위해, 없어도 삶에 지장 없는 물건들을 사기 위해 현대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지루한 업무를 반복하며 보낸다.

그러나 네스는 은둔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2차 대전 중 노르웨이를 점령한 독일군이 대학생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려 할 때,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학생 수천 명을 구해냈다. 1980년엔 일흔이 다 된 몸으로 노르웨이 북부의 댐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쇠사슬로 암벽에 몸을 묶었다. 무엇보다 그는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을 주창자로 불린다. 1984년에 제기한 ‘심층생태론의 8대 강령’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1. 인간과 인간 아닌 생명체들의 번영은 그 자체로 고유의 가치를 갖는다.

2. 생명체의 풍부함과 다양성은 이러한 가치의 실현에 기여한다.

3. 인간은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풍부함과 다양성을 감소시킬 권리가 없다.

4. 인간과 다른 생명의 번영은 더 적은 인구가 있을 때 가능하다.

5. 현재 자연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은 과도하며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6. 인간은 지구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지배적인 행동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7. 선진국들에서 삶의 질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지속가능한 개발이 가능할 것이다.

8. 이상의 강령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직간접적인 방법으로 변화를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 심층생태론의 8대 강령(요약)

요컨대 심층생태론은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근대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한편으로 환경운동을 부자 나라들의 공해추방 운동 정도로 이해하는 ‘표피적 생태론’을 넘어선다. 심층생태론은 모든 생명체가 동등하고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으며, 인간은 자연을 결코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 물론 네스는 자연의 존속을 위해 인간이 사라지는 게 더 낫다는 극단적 생태론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연은 그 자체로 ‘자유로우며’, 인간이 자연의 자유를 정당한 이유 없이 박탈하는 것은 범죄라는 생각을 네스는 철저히 견지했다.

생각하면 고통스럽다, 즐길 수가 없으므로

동네 얘기로 돌아오자. 한 발 양보해서 재건축의 당위를 받아들인다 해도, 마당의 목련나무를 근처 공원에 옮겨 심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는지가 나를 화나게 한다. 수억 원짜리 건물을 올리면서 고작 그 나무 한 그루를 살릴 비용은 없었던 걸까. 무엇보다, 그 목련나무를 뿌리째 자를 권리가 집 주인에게 있는가. 자기 소유의 나무니까? 인권, 동물권도 있는데 나무의 권리, 수목권(樹木權)은 왜 없을까? “인간에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무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아선 안 된다”, “나무는 자신의 거처에 뿌리내리고 살 권리가 있다”, 그런 권리에까지 이제는 눈뜰 때가 되지 않았을까.

네스는 말한다. “생각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면 즐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생각을 했다면, 동네 사람들 누구나 한번은 감탄했을 그 목련나무를 포클레인으로 1분 만에 제거하는 일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통스러웠을 테니까. 세상을 화폐와 상품가치로 줄 세우는 건 쉽지만, 인간과 생물의 유기적 관계를 상상하기란 힘들다. 으리으리한 빌라 자리에 얼마 전까지 수줍게 발간 감이 열렸다는 걸 상상하기란 어렵듯이.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고통을 피하는 동안, 마을의 나무들도, 이 지구를 구할 기회도 차츰 사라져 돌이키지 못할 순간이 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