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 시대만큼 논란이 많은 연대는 없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기적적인 경제발전을 통해 과거의 빈곤과 후진성을 극복하고 오늘의 풍요로운 한국을 있게 만든 황금기로 묘사되며, 한편에서는 파쇼적 통치와 민주주의의 암살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모순과 병폐가 싹튼 암흑기로 묘사된다.

이들 관점을 각각 '동아시아 기적'의 시각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시각으로 이름할 수 있다면, 이 책의 엮은이는 접점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이 두 시각 간의 비판적인 대화와 상호대질을 통해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의 양면성을 고찰함으로써 오늘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기원을 탐문한다.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적지 않은 전문적 연구성과가 나와 있지만 이 주제에 대해 대학 캠퍼스나 시민 공론장에서 적절한 안내서를 찾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 책은 이런 갈증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 박정희 시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민강좌 성격의 대중학술서를 집필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박정희 시대 경제개발의 성공 요인과 개발체제의 특징을 해명하면서 한국의 산업화 성공이 뚜렷한 정책적·제도적 바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것의 파행성과 불균형성에 주목한다(1부). 그리고 정치적·사회적 측면에서 개발독재의 야만과 위험에 대해 살펴보고, 박정희 신드롬과 박정희 담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2부).

P.6 : 개발독재는 독재권력 주도로 경제개발=산업화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을 억압?통제하는, 국가주의적 근대화 수동혁명체제로 파악된다. 한국의 개발독재 또한 이같은 이중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냉전-분단상황을 국민동원과 독재권력 축적에 뛰어나게 활용한 준전시 개발독재 모델이자, 고도의 집권집중형의 파행적 특성을 갖고 있다. 필자(이병천)는 박정희 모델이 전전 일본 초국가주의의 냉전 한국판이면서 동시에 후발 추격산업화 성공을 위한 보편적 요소도 가지고 있다고 본다.

 

P.20 : 개발독재론은 동아시아 사회의 정치경제적 변동을 세계체제론 같은 외인론이나, 종속이론처럼 세계경제와 단절을 지향하는 비관적인 종속적 발전론 또는 재생산론이 아니라, 국민국가 수준을 중심에 놓으면서 여기에 기회와 압박의 양면성을 갖는 세계체제적 요인을 결합하는 접근방식을 취할 수 있게 해준다.

 

P.21 : 개발독재에서 개발의 기본적 의미는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산업사회로의 이행과정으로서의 경제개발, 즉 산업화이다. 그렇지만 동아시아사회에서 개발은 단순한 경제적 산업화의 의미 이상의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동아시아 특유의 민족주의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사회에서 개발의 이념 또는 개발주의에는 국가와 민족의 이해를 최우선시하면서 경제개발을 통해 국력을 신장하고 위로부터의 국민통합을 달성한다는 강력한 국가민족주의의 의미가 담겨 있다. 개발은 곧 '국가의 개발', 국가발전의 최우선적 목표 가치로서의 개발이며, 이는 성장이데올로기의 국민적 공유 및 성장을 위한 국민동원과 위로부터의 국민통합의 형태를 취한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개발주의는 단지 국가민족주의적 산업주의일 뿐아니라, 냉전체제 아래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체제경쟁적인 냉전반공 개발주의, 적의 존재에 의존하는 '생존의 정치'로서의 반공개발주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