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8-49 : 에반스가 제시한 발전국가와 약탈국가의 대비는 통상적으로 인식되어온 전제적 권력(despotic power)과 하부구조적 권력(infrastructural power)을 보유한 '강한 국가', 국가의 목표가 사회세력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자율적 국가'가 반드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약탈국가는 국민복지와 국민경제의 성장을 저해하는 약탈적 행위만을 일삼는 국가로서, 사회로부터 거대한 양의 투자 가능한 잉여를 추출하지만 그것을 경제혁신에 필요한 집합재로 공급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발전국가는 혁신적 투자의 유인을 제공하고, 투자의 위험도를 낮춤으로써 민간자본이 장기적인 기업가적 시각을 갖도록 유도하며, 사회적 잉여를 특정한 이해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국민을 위해 사용한다는 점에서 경제혁신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Evans, 1995: 44-45).
- 에로이카

P.49 : 에반스의 논의에서 약탈국가와 발전국가가 구분되는 결정적 기준은 '강력하고 유능하며 집합적 응집력을 지닌 관료제'와, 이른바 '배태된 자율성'의 존재 여부에 의해 가늠된다. 국가의 시장개입이 지대추구행위와 비효율성을 낳는 것이라는 신공리주의의 주장과는 반대로, 에반스는 약탈국가의 면면이 관료제의 과도함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관료제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또한 관료제의 '고립된' 자율성은 경제성장을 촉진시키는 국가능력성과 별 관련이 없으며, 국가와 시민사회, 국가와 시장행위자 간의 외부 연계망을 의미하는 배태된 자율성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국가는 산업혁신의 견인차가 될 수 있다. 에반스에게 배태된 자율성은 약탈국가의 응집력 없는 전제주의의 거울 역상이며, 발전국가 효율성의 열쇠로서 간주된다.
- 에로이카

P.52-53 : ... 에반스가 말한 대로 발전국가를 약탈국가와 구분짓게 하는 핵심적인 기준이 '집합적 응집력을 지닌 관료제'와 '배태된 자율성' 그 자체에 있지는 않다. ...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배태된 자율성은 발전국가가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근대국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성이다. 시민사회 및 민간부문과 완전히 절연되고 고립된 국가관료기구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요인이 약탈국가와 발전국가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인가?

첫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점은 국가의 정책지향성과 정당성의 근거이다. ...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모두 반공을 국시로 하고 있지만, 박정희가 그것을 경제성장이라는 실적 정당성과 결합시켰다면, 이승만은 안보요인에 보다 편향된 체제였다. 즉, 박정희의 발전국가가 '경제동원체제'였다면, 이승만의 약탈국가는 기본적으로 '전쟁동원체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정일준, 1999). 바로 이 점이 이후 출현하게 될 발전국가의 구조적 요인들을 충분히 구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하의 국가기구가 발전국가로 성립되지 못한 결정적 이유이다.
- 에로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