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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과 이야기까페 이야기 - 김현주(경영학과 94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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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오면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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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6 22:0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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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과 이야기까페 이야기 - 김현주(경영학과 94학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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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 |
266 |
이름 : |
그날지기 |
작성일 : |
2007-10-25 11:25:51 |
조회수 : |
1,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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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과 이야기까페 이야기
대학에 들어와 캠퍼스보다는 주로 녹두거리 어디쯤에서 열심히 평범한 대학생활 을 했던 나에게 '그날'은 주로 그날 그날의 모임이 적혀있는 이정표였고, 입구에 즐비했던 시집들과 얼마든지 서서 읽어도 편안했던 소설책들로 대표되는 그런 편 안한 기댐의 장소였다. 그런 그날이 내게 좀 더 각별한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은 갑작스럽게 관련되어 버린 98년 총학생회 문화국에서 대외사업을 담당하면서, 당 시 대학을 떠날 연배의 운동 선배들의 이끌림에 의해 녹두거리에 당시 존재했던 지역문화랄까 공간문화랄까 그런 흐름의 중심으로 얼결에 들어가게 되었던 때 부 터였던 것 같다. 당시에 녹두거리를 비롯한 대학 내외에서 대안공간을 찾고 대안적인 대학문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려는 노력들이 존재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지금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 버린 태백산맥의 '라이브공간' 만들기였고, 다른 하나는 '그날에서 책읽기' 라는 무가 서평지 발행을 중심으로 한 자생적이고 학술적이었던 그날 주변 모임이 었다. 당시에 창작자도 아니고, 남을 설득할 정도의 언변과 경험을 갖춘 운동권 출 신도 아니고, 그냥 무한한 자발성+총학생회라는 이름값을 가지고 그 모임들 가운 데로 나는 소개되었고, 얼결에 이런저런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노래라고는 대중 가요는 물론 어느 장르도 잘 모르고 몇 곡의 민중가요 밖에는 모르던 내가 태백산 맥의 큐레이터를 맡아서 공연을 진행해야 했고, 매주 그날에서 책읽기 모임에서 서평을 나누고 표지를 그리고 가끔은 만화도 그리고 칼럼도 썼다. 그 즈음에 만난 우리들은 한 동아리를 형성할 정도의 창작자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우리들은 당시 관악구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공간이 필요했던 그날 유정희 대표와 함께, 의 기투합하여 마침 가게가 났던 그날이 오면 2층에 대안적인 까페 겸 일종의 아지트 -소모임 공간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 때부터 우리는 회의를 거쳐 서로가 꿈꾸던 '이상화된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음껏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까페가 좋겠어. 칠판이 있고, 단체로 앉을 긴 테이블이 있으면 좋겠지. 저렴한 차와 간단한 요깃거리도 필요해. 벽을 따라서 사진이나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흰 벽이 있으면 좋겠다, 그 밑에는 두 줄로 책장 을 짜넣자. 그렇게 꿈처럼 시작된 설계는 공사가 시작되면서 현실화되기 시작했고 , 다들 회칠을 하고, 가구를 사러 청계천 일대를 뒤지고, 그렇게 한 걸음씩 우리들 의 이야기까페가 만들어졌다. 까페 공간은 다양한 필요에 따라 구분되어졌고, 무 대의 단을 다르게 해서 필요하면 소규모 행사나 공연이 가능하도록 마루를 짰다. 흰 벽을 따라 작은 전시공간이 마련되었고, 그 벽 뒤로는 우리의 모임방을 배치했 고, 작은 그 공간 안에는 쇼파랑 책장, 테이블, 컴퓨터책상. 당시까지만 해도 아날 로그 사진을 자기 매체로 가진 이들이 많앗기에, 다시 그 안을 쪽방으로 나누어 암 실까지 배치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까페. 까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이름으 로 불리었고, 우리의 모임은 '와이낫Y-NOT'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생각해보면 짧은 시간이었다. 이야기 까페는 주로 그날과 녹두거리를 중심으로 학 생운동의 호응을 얻었고, 비슷한 이름의 까페가 생기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날에 들르듯 편하게 이야기 까페에 들러, 저녁에는 차값이나 시간의 부담 없이 세미나 며 회의를 하고, 밤이면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할 수 있었다. 이야기까페에서는 항 상 아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혼자 머물기에도 부담이 없어 굳이 동무가 없어도 좋았다. 와이낫의 주도로 사진 전시가 이루어졌고, '노래 이야기'와 같은 작은 공연도 있었다. 까페가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은 그날에서 책읽기 초청으로 이야기마당이 벌어질 때였다. 당시 오랜 망명생활 끝에 한국을 찾은 홍세화 님의 ' 오늘도 마로니에는~'으로 시작되는 부드러운 노래와 이야기를 함께 들었고, '신좌 파의 상상력'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조지 카치아피카스와 같은 세계의 석학'이 들 러 발제를 하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이야기까페에서는 상상하던 모든 것들이 자발성과 가능성의 토대 위에 무한히 열 려 있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미지의 '대안'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 서 나는 조금씩 성장했던 것 같다. 창작하는 사람들, 자신의 매체를 가지고 길을 찾아 가고자 고민하는 재능있는 동기들과 선후배들을 만나면서, 판을 만드는 사람 -'기획자'로 살아가던 나도 점차 다시금 나의 매체를 갈구하게 되었고, 취미로서 가 아니라 나의 목소리가 되어줄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취업을 했고, 녹두 문화제를 함께 했던 후배들과 '숨은그림찾기'라는 모임을 만들고, 조금씩 내가 맡 은 자리와 고민을 물려주면서 그렇게 녹두거리 중심의 내 생활도 조금씩 달라져갔 다.
그리고 이야기까페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래 전부터 까페가 어렵다는 이 야기를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태백산맥이 사라졌듯이, 이야기까페도 그 렇게 유흥과 소비문화로 가득찬 녹두거리(지금은 신림9동 고시촌 일대라고만 불 릴)의 높은 임대료와 변해가는 학생들의 수요를 맞춰줄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가난했던 시절의 우리들의 주머니를 편안하게 했던 그날과 이야기까페, 태백산맥 과 같은 학사주점으로 돌아갈 때에 우리들은 언제나 고향을 찾는 가난한 젊음으로 추억에 젖을 따름이지만,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가며 생업을 삼은 사람들, 떠나지 않 고 머물러 사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야기까페는 대학동 아리나 다른 집단과는 달리 유형의 공간(상업공간)에 기초를 두고 있었고, 비록 한때 그곳을 깃들었던 우리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인행세를 하였을 지언정, 결 국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곳을 책임져야 했던 사람은 그날아저씨 가족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까페는 실패였을까? 나는 이야기까페의 실험이 실패는 아니었다 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들의 까페는 비록 세월 속에 살아남아 생명을 누리지는 못 하였지만, 그 때 우리의 삶의 방식과 테두리 안에서 빛났고, 의미를 누리다가 시절 과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조금씩 그 존재이유와 생명을 다해갔던 것인지 도 모른다.
한 때 깃들었던 우리들은 학교를 떠나고 학생운동을 떠나듯 그 공간을 떠나왔다. 하지만, 녹두거리에 아직까지 '그날'이 버티고 있기에, 우리의 학교와 그 시절은 마음 속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아직껏 공간에 깃들여 숨쉰다. '그날'이 없다면, 우 리의 그 시절을 증명해주고 깃들여줄 몸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셈이다. 오랜 세월 이 흘러 그곳을 다시 찾았어도 '그날'을 찾아갈 수 없다면 우리의 지나온 삶이 무 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내가 '그날'을 통해 얻었던 많은 경험과 가치를 나의 후배 들에게 또 자라나고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돌려줄 수 없다면 나는 과연 떳떳할 수 있을까. 그때 함께 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음악을 하던 사람이 지금도 음악을, 영 화를 하던 사람 중에는 영화쪽 생업을, 만화를 그리던 사람은 만화가로, 사진쟁이 는 사진가로, 공간을 만들던 사람은 여전히 공간을 그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 는 모습을 종종 접하면서,요즈음의 나는 나의 삶의 길잡이가 되어줬던 그날와 그 시간을 되돌아 보게 된다. 그 시절에 만난 우리 모두에게 그 시간의 삶이 어쩌면 대학을 다닌 4년에서 길게는 십 년에 달하는 시간보다 어쩌면 '정수'에 가까왔던 것을 아닌가 자문해 보는 것이다.
김현주(경영학과 94학번) TV애니메이션 '하얀물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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