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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오면과의 인연
인연 - 김영지 | 그날이오면과의 인연 2010.12.07 00:37:32
그날이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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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연

 

김 영 지

 

며칠 전, 그날이 오면에서 책을 샀다. 그런데 하필 한 권이 파본이라서, 교환을 하러 서점에 가는 길에 마침 인근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이 서점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 책을 한 아름 들고. 그 교복은 내가 고등학생 시절 입던 교복이기도 했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의 사장님이 웃음 띤 얼굴로 맞이해 주신다. 도림천이 흐르는 이곳에 그날이 오면이 함께 있다. 그리고 서점 그날이 오면의 기억은 내가 한참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인연이란, 이제 20대 중반으로 넘어가는 나 이지만 정말 오묘하게, 때로는 감동적으로 다가오고 엮어나가며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사람이기에 이루어낼 수 있는 기적 같은 것.

올해로 이곳 신림동에 살게 된지 20년이 된다. 나는 아주 어릴 때 이곳으로 이사 왔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나의 역사가 쓰여졌고 지금도 소중한 사람들을 알게 되었기에 이곳은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좀더 솔직하게 드러내 본다면, 나는 삼성초등학교, 신림여자중학교(현 삼성중학교), 삼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당시 우리끼리 회자되던 Three-S 였다. 초등학생 시절 집으로 가다가 그날이 오면 근처를 지날 때마다 서점 간판의 ‘그’ 글자가 반대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며 많이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교과서로 우리말을 배우고 익히던 내 눈에 그 간판은 참으로 생경했다. ‘서점 주인 아줌마가 착각했나봐’ 라며 혼자 공상을 하며 히히거리던 기억이 난다. 왜 ‘그’ 라는 글자는 뒤집힌 걸까? 라는 생각이 든 게 아니라, 내 눈에 그 글자는 신기한 것이었다. 그렇게 매일을 오가던 그날이 오면의 서점이 ‘보통 서점’ 의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중학생이 된 이후였다. 내 몸보다 좀 더 큰 교복 치마를 입고 여학생인지 남학생인지 의아한 짧은 커트 머리의 앳된 얼굴, 어느 중학생은 용기(!)를 내어 서점에 들어갔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가요 테이프’ ‘박종철 출판사’ ‘자본론’ 등등이었다. 나는 시험 대비 문제집을 사러 서점에 많이 갔었지만 이렇게 진기한 장소는 처음이었다. 서점에 가게 된 계기는 ‘서울대 교재’ ‘인문사회과학 서점’ 이라는 소개 때문이었다. 서울대생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공부를 하는 거야? 라는 호기심도 있었고, 다른 서점은 ‘인문사회과학 서점’ 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 라는 궁금함도 있었다. 나의 첫인상은 지금의 서점과 거의 비슷하다. 자유로이 책을 찾아 볼 수 있었고, 문이 열리고 닫히며 딸그락거리는 종소리도 났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동안 가 본 서점에 없는 책들이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는 마침 도덕을 배우고 있었고, 어렴풋이 칸트에 대해 배운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바로 서점에 갔다. 그리고 이 책 저 책 구경하는 척 하다가,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저기...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있어요...?’

당시 일하시던 분은 (남자분이셨는데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한 번에 그 책을 찾아 카운터에 가지고 오셨다. 매우 얇은 책이었는데, 정말 놀랐던 것. ‘포장해드릴까요?’ 비닐로 책을 포장한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특히 책을 소중히 여기던 나는 다른 서점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포장’ 이라는 말을 듣게 되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겨우 열다섯 살의 나는 그 당시에는 그 책을 잘 읽지 못했지만 왠지 자부심이 들었던 기억이 나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나 그날이 오면에서 책 샀어!!’

그렇게, 나의 첫 구입 도서는 실천이성비판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의 꾸준한 업데이트와 함께 나의 고민도 점점 깊어졌다. 서점 앞에 새로 나온 책 소개글을 보면 꼭 하나씩 다 읽어 보았고, 언젠가는 꼭 그 책들을 읽어보리라는 목표도 생기게 되었다. 굴곡이 많고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고등학생 때는 나의 정체기였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학생 시절을 보내는 동안 가끔 그날이 오면에 간 적은 없었지만 내가 공부를 끝마치고 집에 갈 때마다 서점 간판이 환히 비친 모습을 보고 힘을 얻기도 했다. 9시, 10시면 정리를 하는 서점에 비해 그날이 오면은 자정 즈음에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오히라 미쓰요 변호사의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라는 문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1, 2학년 때 공부가 잘 안 되는 날엔 고시촌을 돌아다녔다. 독서실에서 잠깐 나와 고시촌의 야경을 보았다. 그 화려한 풍경이, 나의 지금 위치와 왜 이렇게 대조되는 건지. 그럴 때마다 눈물을 쓱 훔치고 들어가는 날들이 많았었다. 그렇게 고생(!)을 한 대가는 돌아오는 것인지, 나는 수능을 치지 않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면서 그날이 오면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입시의 부담에서 벗어난 나는 마음 편하게 그날이 오면에 갈 수 있었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 간판을 보며 ‘저 글씨 이상해!’ 라고 생각했었는데, 대학생이 된 나는 그 간판이 어느새 매우 익숙해져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오히려 뒤집어진 그 글자의 의미가 크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교복을 입고 주저하며 칸트를 찾던 앳된 학생은 아주 조금은 성숙한 얼굴로 서점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양한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아, 민족21이라는 잡지가 있구나, 마르크스에 관한 책이 이렇게 많구나, 자본주의 역사, 북한, 나는 그 서점에서 책을 찾아보기 보다는 ‘관람’을 했었다. 이러한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서점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의 키워드는 북한, 사회주의, 여성주의, 그리고 민주화 운동사였는데 이것을 고루 갖춘, 그리고 다양한 자료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날이 오면이었다. 대학생이 된 후 그날이 오면이 대학생 지식인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나의 자부심은 한껏 높아졌다. 나는 그날이 오면을 보며 성장했기에.

사담 하나. 내가 고등학교 졸업식 날, 전교생이 다 모인 강당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 시상을 하셨던 분이 바로 유정희 사장님이시다. 나는 마음 속으로 ‘앗, 그날이 오면 사장님이시다!’ 라고 깜짝 놀랐다. 상장을 주시고 유정희 사장님이 미소를 지으시며 악수해 주신 장면이 생생히 기억난다. 농담이 아니라 나는 그날 악수한 손을 씻지 않았다.(정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있었던 서평 대회에서 3등에 입상하는 영예로운 순간이 오게 되었다. 거의 5년만의 일이다. 그때는 유정희 사장님, 김동운 사장님 모두 계시는 서점에서 상장을 받을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유정희 사장님, 서평 대회에서는 김동운 사장님이 시상하셨다. 아, 이러한 것도 인연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두 번의 서평 대회에 글을 응모한 적이 있고 한 번은 예심 통과, 그리고 이번엔 3등에 입상할 수 있었다. 나는 사장님과 알게 된 인연도 있어서 만약에 실명으로 글을 썼는데 떨어지면 개인적으로 무척 창피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예명으로 글을 냈으나... 서점에 들어가자 김동운 사장님께서 ‘김 ㅇㅇ(예명)입니다’ 라고 소개하셔서 집에 가는 내내 창피하고 웃음이 났던 기억이 난다.

대학생 이후 활발하게 그날이 오면 근처를 자주 지나간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중학생 은사님과 녹두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그날이 오면에 들어가서 선생님이 취기에 오르신 상태에서 책 네 다섯권을 사주신 적도 있고, 어느 여름 비가 정말 잔인할 정도로 많이 오던 날 바지가 몽땅 다 젖은 상태에서 서점에 들어 와서 사장님이 깜짝 놀라셨던 기억도 난다. 그때 자본론이 꼭 필요했었다. 그래서 내 몸이 다 젖어도 책은 절대 젖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쏟아지는 빗속에서 책을 부여잡고 집에 갔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오후에 서점에 놀러 가서 책 구경을 하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한 번 가서 괜찮은 책을 체크한 후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와 구입하여 집에 가져가서 펼쳐 보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곳은 영혼이 교감하는 장소였다. 책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영향력을 미쳤을 때 소통의 기쁨을 느낀다. 그 작가의 메시지를 내가 읽게 되는 순간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날이 오면엔 그러한 진솔한 책들이 정말 많았다. 그만큼 노동, 인권, 성 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유롭게 피어나는 장이었기에.

유정희 사장님께서 ‘그날과의 인연’ 이라는 글 제안을 하셨을 때 바로 수락할 수 있었던 건 나의 중학생 시절 모습이 떠올랐고 같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학교에 가면 그때의 어린 내가 창밖으로 운동장에 선 나에게 손을 흔드는 듯한 그림이 느껴진다. 그때의 감수성, 철이 덜든 어린 내가 며칠을 두고 서점을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들어갔을 때 느꼈던 설렘. 이제는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아주 조금은 알아버린 나는 오늘도 그날이 오면의 문을 두드린다.

고향과도 같은 신림동에 살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신림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그날이 오면 서점이 있다는 점이다.(대체로 내가 신림동에 산다고 ‘커밍아웃’을 하면 질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A: 혹시 서울대 근처 아니에요? 나: 네, 맞아요. 혹시 그날이 오면 아세요? A: 네, 들어 봤어요 / 네, 가 본 적 있어요) 점점 인문사회학 서점이 사라지면서 그날이 오면은 그 자체로도 상징적인 의미로 떠올랐다. 만약 내가 대학생활 이후 ‘아주 평범한’ 일상을 따라가는 보통 학생이었다면 어쩌면 이 서점에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서점에 들어갔을 때 다듬어지지 않은 돌 같은 느낌이었고 이제 서점에서 책을 사고 읽으면서 모양을 갖춰간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고민하며 나를 갖춰가고 사람들과의 연대를 하는 힘을 기르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며 내가 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내가 그 연습을 하고 사람들과 세상 사는 법을 알아가고 배우는 동안 솔직히 그날이 오면이 지금 이 자리에, 항상 한결같이 언제나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 첫인상을 기억한 곳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대수롭지 않게 스쳐간 서점도 아니었고,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나는 그날이 오면과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젠 그날이 오면의 뒤집어진 글자에 궁금함이 들지는 않는다. ‘언제 나에게 그날이 올까?’ 라는 궁금함이 든다. 모두에게 다가오는 그날은 다르겠지만 언젠가 나에게 그날이 온다면 나는 서점을 빛내고픈 단골 손님이 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서점에 올 때마다, 한번도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유정희 사장님, 김동운 사장님 모두 소중한 분들이다. 이 분들이야말로 참으로 그날의 인연이 아닐는지. 나는 나중에 자서전을 낸다면 (사장님의 허락이 있다는 전제 하에) 그날이 오면과의 인연을 적고 싶다.

그날이 오면에 들를 때마다, 업데이트 된 책 목록을 볼 때마다 내 발은 한 보씩 앞으로 나아간다. 내가 서른 즈음에 서점을 찾을 때, 나도 더 성숙한 상태에서 항상 그 자리의 서점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서점에 올 때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고 사람을 만났다. 서점이라는 공적 공간에서 나는 공동체의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앞에서 인연이란 서로 얽히고 만들어지며 생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그날이 오면과의 추억에 대해 회상할 줄을 그 어린 날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오늘 서점에서 나와 어딘가로 걸어가는 교복 입은 여학생을 보며 그 학생이 무엇을 샀는지 궁금하면서도 그날이 오면에 온 고등학생이라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학생에게도 나에게도, 그날이 오면이 언제나 편하게 갈 수 있고 서로 배워가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부족하지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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