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잔인했던 4월의 어느 날.
서점 ‘그날이 오면’이 ‘털렸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잠시 뒤 서점 대표인 유정희 누님이 그 유명한, 서슬 퍼런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이른바 ‘불온서적’을 판매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들이 얘기하는 불온서적에는 당시 서울대 강의 교재도 포함돼 있었다.
서울대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곧장 대공분실 항의 방문 계획이 잡혔다. 서울대 학생 100여명이 동참했다. 문민정부가 정권 말기에 공안 정국을 조성하던 터라 학생들 저마다 단단한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숙대입구 전철역 근처로 삼삼오오 모여든 학생들은 이내 대열을 갖추고 대공분실로 향했다. 50미터나 전진했을까, 학생들은 순식간에 어디선가 나타난 경찰에게 둘러싸였다. 더 이상 한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 학생들은 옆 사람과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의 요구는 간단했다. 유정희 누님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풀어주지 않으면 불온서적으로 공부한 우리도 함께 잡아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님을 풀어주지도, 우리를 잡아가지도 않았다. 역시 우리의 말은 지지리도 듣지 않는 그들이었다.
해질 무렵 그날이 오면 앞에서 약식 집회가 열렸다. 누님의 조속한 석방을 기원하는 자리였다. 사회대 학생회장이라는 이유로 내가 그 자리 사회를 맡게 됐다. 사실 그 때 무슨 말을 했는지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날이 오면과의 끈끈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나는 책을 잘 읽지 않는 학생이었다. 세미나, 토론회보다 집회 참여나 뒤풀이를 더 좋아했다. 선배들은 좋게 말해 머리보다 몸이 앞선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주로 책을 읽기보다 사람들과 만남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그날이 오면을 찾았다. -당시에는 핸드폰이나 인터넷 까페가 일상화하지 않은 시기라 만남(주로 술자리)의 주체와 장소를 메모지에 적어 그날이 오면 앞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게시판은 이 같은 아날로그식 메모지로 매일 빼곡 찼고 메모 이면에는 ‘누구든 환영한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었다. 술을 좋아하거나 사람 냄새를 반기는 학생들은 으레 집에 가기 전에 그날이 오면에 들러 아는 자리가 있는지 메모를 확인하곤 했다. 그만큼 게시판은 중독성이 강했고 나를 포함한 많은 학생들이 ‘그날 폐인’을 자처했다. 그날이 오면은 만남과 소통의 시작점이었다.- 그날이 오면 앞에서 집회 사회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와 그날이 오면의 관계는, 다른 학생들과 그날이 오면의 관계 이상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일년 뒤 더욱 특별한 기회가 찾아왔다. 고초를 겪고 풀려난 유정희 누님이 무소속으로 관악구 구의원에 출마하기로 한 것. 5학년으로 아직 학교를 떠나지 못한 나에게 선거운동을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흔쾌히 같이 하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승리에 목말라 있었다. -바로 앞선 1997년 대선에서 나는 김대중 후보가 아닌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게 투표했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구속을 피하지 않았던 누님이었기에, 생활 속 진보를 일굴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이었기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
유정희 누님, 김동운 ‘그날 아저씨’, 친한 동기, 선․후배들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돌아다녔다. 집회에서 군중을 향해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하는 것이 훨씬 힘들었다. 그해 5, 6월 뙤약볕은 유난히 따가웠다. 유정희 누님과 김동운 아저씨의 서점에 대한 열정, 삶의 가치관도 덤으로 배울 수 있었다.
개표 날. 유정희 누님은 우후죽순 격으로 출마한 많은 기존 정당인들을 제치고 40%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당히 정치에 입문했다. 그날 나는 유정희 누님과 김동운 아저씨와 뜨거운 포옹을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승리의 눈물을 뿌렸다
나에게 그날이오면은 서울대 유일의 인문사회과학 서점을 넘어,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였다.